커리어 계획을 짜며 하루에 8~9시간씩 AI와 대화한 적이 있다. GPT-6 Pro의 긴 답변을 계속 읽었지만, 대화를 마치고 나면 힘만 빠지고 결론은 흐릿했다.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생각한 방향보다 AI가 설명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. 이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. 다른 사람은 나와 같은 삽질을 덜 했으면 해서다.
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를 때
처음에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몰랐다. 그래서 커리어와 창업처럼 변수가 많은 문제를 통째로 AI에게 던졌다. 내가 원하는 삶, 감수할 수 있는 위험, 지금 가진 자원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. 그러면 AI는 그럴듯하고 폭넓은 답을 줬다. 하지만 그 답이 내 문제의 핵심을 짚었는지 판단할 기준이 나에게 없었다.
AI의 답변이 길수록 더 깊은 생각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. 나는 그 제안들을 검토하기보다 그 안에서 다음 질문을 골랐고, 다시 긴 답변을 읽었다. 대화는 계속됐지만 내 생각은 오히려 좁아졌다. 어떤 제안은 이미 누군가 해결한 문제였고, 어떤 것은 애초에 내가 풀고 싶은 문제가 아니었다.
전문가에게 물었을 때 느끼는 차이도 여기 있었다. 단지 지식의 양이 아니라, 실제로 부딪혀 본 사람이 어떤 조건을 먼저 확인하는지에 차이가 있었다. AI도 모르는 지점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, 그 차이를 알아보고 계속 파고드는 일은 내가 해야 했다.
AI에게 맡길 수 있는 것과 내가 해야 할 것
AI는 질문을 정리하고, 빠뜨린 관점을 제안하고, 내 생각의 허점을 지적하는 데 유용하다. 그러나 “나에게 좋은 결정”을 대신 내리기는 어렵다. 내 경험, 우선순위, 책임을 AI가 온전히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. 답변을 읽기 전에 먼저 내 가설을 적어 두면, AI의 말에 무작정 끌려갈 가능성이 줄어든다.
질문에도 제약이 필요했다. “나는 어떤 커리어를 선택해야 할까?”보다 “앞으로 6개월 동안 주 20시간을 쓸 수 있고, 자본이 거의 없으며, 직접 구현을 해보고 싶다. 이 조건에서 두 방향을 어떤 실험으로 비교할까?”가 나에게 더 쓸모 있었다. 제약은 AI가 답을 잘하도록 돕는 동시에,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확인하게 한다.
그래서 도메인 지식은 AI 시대에도 중요하다고 느꼈다. 많이 알수록 질문을 더 좁힐 수 있고, 답변의 허점을 발견할 수 있다. AI가 좋아지면 덜 배워도 된다는 기대와 달리, AI를 제대로 쓰려면 무엇을 시키고 무엇을 검증할지 알아야 했다.
왜 코딩에서는 유난히 강해 보일까
코딩 에이전트가 강력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, 프로그래밍에는 명시적인 규칙과 빠른 피드백이 많다. 코드를 실행하고, 테스트하고, 오류를 고칠 수 있다. 물론 실제 소프트웨어 개발도 요구사항, 사용자, 운영 환경이 얽히면 복잡해진다. 그래도 많은 작업에서 결과를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인생의 결정을 내리는 일과 다르다.
나는 이 차이를 잊고 커리어 문제도 코드처럼 명확한 정답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. 하지만 복잡한 세계를 AI에게 그대로 넘길수록 답은 평균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쉬웠다. 반대로 내가 목표와 제약을 정하고, 작은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질문으로 바꾸면 도움이 됐다.
긴 답변을 읽기 전에
지금은 AI에게 묻기 전 세 가지를 먼저 확인하려 한다. 내가 현재 믿는 것은 무엇인지, 아직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, 이 답을 얻고 나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. AI의 제안은 이 생각을 시험하는 재료로 쓴다. 최종 결정은 내가 내리고, 결과를 보고 다시 생각한다.
AI가 암묵지를 끌어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여전하다. 다만 그 도구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, 나온 말을 의심하고, 행동으로 검증하는 사람은 나여야 한다. 긴 답변보다 중요한 것은 대화가 끝난 뒤에도 내 생각이 남아 있는가다.